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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선생 (1948~1970)

함석헌 선생
현주소
서울시 도봉구 도봉로123길 33-6 (쌍문동 81-78)
두 차례 노벨평화상 후보자로 선정되었으며, 씨알사상이라는 비폭력, 민주, 평화이념을 제창하여 ‘한국의 간디’로 불린 사상가, 종교가, 민주화운동가였으며,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였다. 함석헌 선생이 살던 쌍문동 집은 “함석헌기념관”으로 건립을 추진 중이다.
190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출생하여 당숙 일형(一亨)이 세운 삼천재에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1914년 덕일학교를 졸업하였다. 1916년 양시공립보통학 교를 졸업하고 그 해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으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가담하여 학업을 중단하였다가 1921년 정주의 오산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때 안창호·이승훈·조만식으로부터 민족주의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1923년 오산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1924년 동경고등사범학교 문과 1부에 입학, 1928년 졸업하였다. 재학 중에 일본인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연구에 깊이 영향을 받고 김교신·송두용·정상훈 등과 함께 무교회주의 신앙클럽을 결성하였다. 1927년 동인지 『성서조선』창간에 참여하여 글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1928년 4월 귀국하여 모교인 오산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였다가 1938년 3월 사임하였다. 1940년 송산에서 김혁이 운영하는 송산학원을 경영하다가 계우회사건에 연루되어 대동경찰서에서 1년간 구류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1942년 『성서조선』필화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1년간을 서대문경찰서에서 미결수로 복역하였다.
사상가, 민권운동가 겸 문필가. 광복 후, 신의주 학생 의거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북한 당국에 의해 투옥되었다가 1947년 단신으로 월남하였다. 1958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라는 글로 자유당 독재정권을 통렬히 비판하여 투옥되었고, 5·16군사정변 직후부터 집권 군부세력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였다.
안창호, 이승훈, 조만식으로부터 민족주의 사상과 영향을 받았고 1970년 4월『씨알의 소리』를 창간, 민중운동을 전개하면서 반독재민주화운동에 힘을 기울였으며, 1976년의 명동사건, 1979년의 YWCA 위장결혼식 사건에 연루되어 많은 탄압을 받았음. 평생 일관된 사상과 신념을 바탕으로 항일·반독재에 앞장섰다. 주요 저서로는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1948), 『인간혁명』(1961), 『역사와 민족』(1964), 『뜻으로 본 한국역사』(1967), 『통일의 길』(1984) 등이 있다
쌍문동 81-78번지 함석헌 옛집은 함석헌의 차남 함우용씨 부부가 1978년부터 살던 집으로 1982년부터 타계하는 1989년 2월까지 거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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