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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미리사 (1879~1955)

차미리사
묘소
서울시 도봉구 쌍문동 산 278-1
현소재지
서울시 도봉구 삼양로 144길 33(쌍문동 419) 덕성여자대학교
독립유공자, 덕성학원 설립자 차미리사 선생은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통일 그리고 여성들의 권익 신장을 위해 노력한 민족의 지도자요, 통일운동가이며, 여성 교육의 선구자였다.
1. 출생과 출가(∼17세)
차미리사는 1879년 8월 21일(음력) 서울 아현동에서 ‘섭섭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열일곱에 출가하여 딸 하나를 낳고, 3년 만에 남편 김씨와 사별한 후 기독교를 받아들여 상동교회에서 ‘미리사’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이후 그는 교회의 관습에 의거하여 남편 성을 따라 ‘김미리사’라는 이름으로 사회 활동을 하였다.
2. 외국 유학(23∼34세)
자유와 민권사상이 질풍과 노도처럼 조선에 밀려오는 20세기 초, 차미리사는 스물셋의 나이에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때 남겨두고 온 어린 딸과 늙은 어머니에 대한 걱정, 외국어를 배우며 고학하느라 심신이 지쳐 지독한 열병을 앓았다. 그리고 그 후유증으로 평생 남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고통에 시달렸다. 중국 유학을 마친 차미리사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교육 구국을 목적으로 조직된 대동교육회 발기인이 되었다. 이것이 그의 첫 국권 회복운동이었다.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교육 운동, 사회활동, 독립운동, 언론활동 등을 활발하게 펼친 차미리사는 미주리주캔사스에 있던 스캐리트 신학교(The Scarritt Bible and Training School)에 입학하였다.
3. 배화학당 교사(34∼42세)
학업을 마친 후, “외국에 있느니 보다는 차라리 고국에 돌아와서 여러 동지들과 손을 잡고 직접으로 사회의 일도 하며 청년 여성을 교육시키어서 우리의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1912년 귀국하였다. 귀국 후 배화학당 사감 및 교사로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천했다. 차미리사는 3.1운동이 발발한지 일주년이 되던 해, 민족의식이 강한 배화학당 교사들과 교류하면서 배화학당 여학생들의 3‧1운동 일주년기념 만세운동을 모의하였다. 1920년 3월 1일 새벽, 그의 조카 이수희를 비롯하여 그의 지도를 받은 기숙사 학생들이 3‧1운동 일주년 기념 만세운동을 벌였다.(이 사실은 문재인 대통령 2019년 8.15 광복절 연설문에서 언급. 그리고 이 때문에 2020년 3.1절 101주년 행사를 배화여학교에서 개최하였음) 배화학당 여학생들의 3․1운동 일주년기념 만세시위 사건을 계기로 차미리사는 남감리교회 여선교부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독자적인 여성교육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였다.
4. 3.1운동 발발과 민족교육(42∼62세)
1) 조선여자교육회 창립과 부인야학(42세)
1920년 4월 19일 조선여자교육회 산하에 부인야학강습소를 설치하였다. 이는 여성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자립적, 자생적, 자각적 여성 교육기관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차미리사는 여성이 인격적으로 독립하기 위해서는 남성처럼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가 주 교육 대상으로 삼은 여성들은 적령기 학생들이 아니라 여성의 대다수를 차지하며 배움의 기회로부터 소외된 가정부인들이었다. 2) 전국순회강연 활동과 근화학원(43∼45세)
차미리사는 순전히 여성들로만 구성된 전국순회강연단을 조직하여 84일간, 67고을, 만여 리를 순회하면서, 가정부인들을 대상으로 낡은 관습, 낡은 사상 타파, 생활 개조, 여성 교육, 여성 해방, 남녀평등, 신문화 신사상을 고취하는 계몽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전국순회강연회에서 모은 성금으로 청진동에 사옥을 마련하고, 부인야학강습소의 이름을 민족의 꽃 무궁화를 뜻하는 근화학원이라 하였다. 여성들이 주체가 되어 교육운동을 벌인 결과로 세운 근화학원은 조선 사람의 뜨거운 사랑과 땀과 피의 결정체였다.
3) 실업교육(46세∼62세)
1925년 근화여학교로 승격되었으며, 차미리사는 교육이념을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생각하되 네 생각으로 하여라, 알되 네가 깨달아 알아라.”로 삼아, 근화의 학생들에게 주체성과 자율성, 사고의 창조성, 지식의 실천성 등을 불어넣고자 하였다. 차미리사는 1934년 재단법인 근화학원을 설립하고 1935년 근화여자실업학교로 인가받아 여성들의 경제적 자립을 돕는 실제적인 교육을 실천했다. 근화여자실업학교는 1938년 일제의 압력으로 민족성을 상징하던 무궁화인 근화의 교명을 덕성여자실업학교로 개명하였다.
4) 일제 압력으로 사퇴(62세)
1930년대 후반 황국신민화 정책이 노골화되면서 일제는 차미리사가 민족사상을 품은 교육자라는 것을 문제 삼고 차미리사에게 교장 자리에서 사퇴하라고 압력을 가하였다. 교육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을 하는 것으로 보아 교장직을 박탈하려한 것이었다. 그는 1940년 8월 총독부의 압력으로 교육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의 나이 62세 되는 해였다. 5. 통일운동(62∼77세)
일제 강점기 민족의 독립을 위해 활동했던 차미리사의 열정은 해방 후 통일 민족국가 수립 운동으로 이어졌다. 차미리사는 1947년 3월 1일 민주주의민족전선이 주최한 삼일절 기념식 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허헌(許憲, 1885~1951), 박헌영(朴憲永,1900~1955), 김원봉(金元鳳,1898~1958), 여운형(呂運亨, 1886~1947), 김창준(金昌俊, 1889 ~ 1956), 김기전(金起田,1894∼1948), 유영준(劉英俊,1890~?)과 나란히 임시의장에 선임된다. 이는 차미리사가 대한민국 여성독립운동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존재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어 조국이 독립의 길이냐, 예속의 길이냐 또는 통일의 길이냐 하는 분수령에 서있던 1948년 4월, 독립운동가, 문학인, 학자, 언론인, 법조인 등이 모여 민족적 자주 독립의 운동을 성원할 목적으로 자신들의 충정을 밝혔다. 분단정부 수립을 저지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할 것을 호소하는 문화인 108인 성명에 차미리사도 기꺼이 동참했다. 일생을 민족의 예속과 분단에 맞서 해방과 통일을 위해 노력한 차미리사는 “내게는 한 가지 한이 있다. 온전한 독립을 못보고 죽는 것이 유한이로다.”라고 유언 남기고 1955년 6월 1일,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6. 독립운동가로 서훈(2002년)
차미리사는 2002년, 광복 57주년을 맞아 독립유공자(건국훈장 애족장)로 서훈되었으며, 현재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는 차미리사를 ‘여성교육의 선각자’로 수록하여 차미리사의 업적과 정신을 한국 근대 여성교육운동의 중요한 지표로 삼고 있다. 현재 차미리사선생의 묘소는 서울 도봉구 쌍문동 산 278-1에 위치하고 있다. 이와 함께 도봉구에는 차미리사가 세운 근화학원을 뿌리로 하는 덕성여자대학교가 위치하고 있다. 덕성여자대학교에는 덕성여대 뿌리찾기의 결실로 민주동산에 세워진 차미리사 동상과 차미리사 기념관이 있으며, 설립자의 교육이념을 현재 대학의 창학이념을 삼아 여성교육을 실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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