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 조성 취지
도봉을 빛낸 근현대사 인물을 주제로 ‘역사문화공원’을 조성하여 우리 구의 역사성을 대내외적으로 널리 알리고 또한, 도봉구 청소년들이 주도하고 주민들이 함께한 평화의 소녀상 건립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을 기억하고, 그 속에서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을 담아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역사교육의 장(場)으로 활용하고자 함
위치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로 552(도봉구민회관 옆)
창동의 세 마리 사자(獅子)란
일제 강점기 말 부일 협력을 거부하고 감시와 탄압을 피해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현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에 은둔했던 독립운동가 김병로(金炳魯), 송진우(宋鎭禹), 정인보(鄭寅普) 세 분을 일컫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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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 김병로(金炳魯) [1887∼1964]
- 옛집터
-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 731
- 현주소
- 도봉구 도봉로134길 14 (창동 731-43)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1887∼1964)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의병과 독립운동가로 활동했고, 광복 후에는 우리나라 초대 대법원장으로 사법부 발전을 위하여 애썼다. 재야 법조인이 되어서는 독재와 맞서 싸운 영원한 민족지도자였다. 도봉구와의 인연은 일제의 탄압으로 독립운동가들의 변론을 제한받자 창동(옛 경기도 양주군)으로 은둔하면서 맺었다.
그는 담양 용추사(龍湫寺)에서 항일운동가 최익현의 열변에 감동을 받은 뒤 1906년 동지들을 모아 일인보좌청(日人補佐廳)을 습격하면서 항일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의병투쟁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게 되자 계몽·자강운동으로 눈을 돌리고 1910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1915년 귀국하여 경성전수학교 조교수로 강단에 섰다가 3·1 운동이 일어나자 사임하고 잠시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원 판사를 거쳐 변호사로 개업했다.
이때부터 김상옥 의거(1923년), 6·10 만세운동(1926년), 간도 공산당사건(1928년), 원산파업사건(1929년), 안창호 치안유지법 위반 사건(1932년) 등의 ‘시국 사건’에 무료 변론을 맡아 항일운동을 지원했다. 신간회(新幹會) 활동에 앞장서 직접 항일운동에 나서기도 했고, 사회주의 단체인 북풍회(北風會)에도 관여했다. 광주학생운동 때에는 진상조사위원으로 활약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했고, 미 군정청의 사법부장 등을 맡아 사법제도의 기초를 닦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1, 2대 대법원장을 지냈으며 법전편찬위원회 위원장과 법조협회 회장을 맡아 사법부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재야 법조인이 되어서는 이승만 독재에 맞섰고, 5·16 군사정변 이후 군정 종식을 촉구하면서 야권통합을 추진하기도 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됐다.
그는 만주사변 이후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1934년 창동리로 이주하여 집을 짓고, 논을 장만해 농촌 생활을 시작했다. 해방 2년 전에는 닭 1,500마리를 키웠으나 사료를 구하려면 일본 관리에게 아부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닭을 모두 처분해 버렸다.
김병로가 창동리로 이주하자 홍명희, 정인보, 송진우도 따라 창동리로 이주해 창동은 독립운동가들의 은거지가 됐다. 일제는 이들 ‘요시찰(要視察) 인물’을 감시하기 위해 양주경찰서에 고등계를 설치했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일제강점기에 함께 산 김병로, 송진우, 정인보를 ‘창동의 세 마리 사자(獅子)’라고 불렀다. -
고하 송진우(宋鎭禹) [1890∼1945]
- 옛집터
-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 281-1
- 현주소
- 도봉구 9-5 창동 21삼풍유치원 부지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1890∼1945)는 중앙학교 교장으로 3·1 독립운동의 기틀을 닦았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과 언론을 통한 민족지도자였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 중앙학교 교장으로 취임해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었다. 1918년 말부터 중앙학교 숙직실을 근거지로 김성수, 현상윤, 최린, 최남선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벌일 방안을 논의했고, 1919년 3·1 운동으로 결실을 보았다. 3·1 운동을 주동한 48인의 한 분으로 며칠 뒤 구속되어 1년 반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21년 《동아일보》 사장으로 취임하여 이후 1940년 폐간될 때까지 20여 년간 사장, 고문, 주필 등을 역임하면서 압제를 무릅쓰고 《동아일보》를 ‘민족의 대변지’로 이끌었다.
《동아일보》를 통해 민립대학설립운동(1922년), 물산장려운동(1923년), 동포위문 활동(1923년), 문맹 퇴치 농촌계몽운동인 ‘브나로드 운동’(1931~1935년) 등을 통해 줄기차게 민족자강운동을 폈다. 국내외독립운동을 비밀리에 연결하고 자금지원을 하거나 이를 크게 보도하면서 국내독립운동의 구심점의 역할을 계속했다. 또한 단군,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의 위업을 널리 알리고자 삼성사 건립을 시도하고(1917), 아산 현충사를 중수(1931) 했으며, 평남 강동의 단군릉을 보수했다(1934).
동아일보 사장으로 있던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신기록으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보도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운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시킨 언론인이었다.
광복이 된 뒤 임시정부 법통론을 주장하면서 여운형, 박헌영 등의 건국준비위원회 참여를 거부했다. 국민대회준비회와 환국지사후원회를 결성하여 건국 준비를 하였고, 한국민주당 창당 시 대표 격인 수석총무에 추대되었다. 그러나 반탁을 강력히 주장한 임시정부 요인들과는 달리 ‘신중한 반탁론’을 펼치다가 1945년 12월 30일 한현우 등의 총격을 받고 피살됐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독립운동가 김병로가 일제의 탄압을 피해 창동(옛 경기도 양주군)에 정착하자 송진우도 창동리 281-1(현재 삼풍유치원 부지)에 직접 한옥을 짓고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살았다. 사람들은 함께 창동에 살던 송진우, 김병로, 정인보를 ‘창동의 세 마리 사자(獅子)’라 불렀다. -
위당 정인보(鄭寅普) [1893∼1950]
- 옛집터
-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 733-4
- 현주소
- 도봉구 도봉로 595-1 (쌍문동 587)
‘광복절 노래’와 ‘삼일절 노래’로 우리에게 더 익숙한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1893∼1950)는 독립운동과 국학 연구에 평생을 바친 학자였다.
양명학(陽明學)의 대가인 이건방에게 사사(師事)한 뒤 1911년과 1912년 망국의 한을 품고 압록강을 건너 이회영 형제 등 독립운동가들을 만났고 전답을 팔아 군자금으로 지원하였다. 1913년에는 중국 상해로 활동무대를 옮겨 박은식, 신규식, 신채호, 김규식 등과 비밀결사인 동제사(同濟社)를 결성하고 광복운동을 벌였다.
그러다 부인이 첫딸을 낳은 뒤 숨졌다는 비보를 듣고 급히 귀국했고, 이때부터 검은색 한복과 모자, 검은색 안경과 고무신 차림으로 다녔다. 나라 잃은 슬픔까지 조복으로 나타낸 독립 염원이었다.
1923년부터 연희전문학교 전임이 되어 한문학과 조선문학을 강의했으며 《동아일보》와《시대일보》 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이때 《조선고전해설》(1931)과 대표 저술인《양명학연론(陽明學縯論)》(1933)을 펴냈다. ‘오천년간 조선의 얼’ 등을 《동아일보》에 연재하여 한국사에 대한 관심과 자긍심을 환기시키고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1935년에는 정약용 서거 100주년을 계기로 안재홍 등과 함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를 교열·간행하는 등 조선학운동을 주도해 조선 후기 실학연구의 초석을 마련했다.
일제의 내선일체(內鮮一體) 정책에 따라 조선어강좌가 폐지되자 1938년 연희전문을 사임하고 전북 익산군에 은거했다. 광복 후에는 남조선 민주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으나 곧 탈퇴하고 국학대학(國學大學) 초대학장을 지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초대 감찰위원장이 되었으나 이듬해 임영신 장관의 독직 사건을 두고 이승만 대통령과 마찰을 빚어 물러났다.
6·25 전쟁이 일어난 1950년 7월 31일 서울에서 납북됐는데, 9월 7일 황해도에서 폭격 피해를 당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1940년 8월 창동리(현재의 쌍문동)로 이주했다. 그의 옛집은 사랑방이 딸린 규모가 있는 초가였다. 사람들은 독립운동가로 일제강점기에 함께 창동에 살던 정인보, 김병로, 송진우를 ‘창동의 세 마리 사자(獅子)’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