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 전형필 (1906~1962)
- 현주소
- 서울시 도봉구 시루봉로 149-18 (방학동 430)
일제 강점기 수탈 되어가는 우리 문화유산을 보호 수집하고, 해외에 유출된 문화재를 되찾아 왔으며, 한국 최초의 사립박물관 보화각(현 간송미술관)을 설립하였다. 방학동에 남아있는 간송 전형필의 한옥이 2012년 국가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전형필의 본관은 정선(廷善), 자는 천뢰(天賚), 호는 간송(澗松)·지산(芝山)·취설재(翠雪齋)이고, 태어난 곳은 종로4가 112번지이다. 휘문고등보통학교를 나와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진로에 대해 고민 중이던 전형필은 휘문고보 졸업 이후에도 자주 찾아 뵙던 휘문고보 시절 미술교사 였던 고희동으로부터 “왜놈들 손으로 넘어가는 우리 서화와 전적을 지키는 선비가 되라”는 당부를 듣고, 오세창을 소개받는다. 3ㆍ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분이었던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ㆍ1864~1953)은 우리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역대 명인들의 글씨와 그림을 수집해 엮은 ‘근역서휘’(槿域書彙)와 ‘근역화휘’(槿域畵彙)를 전형필에 보여주었다. 오세창은 전형필에게 우리 선조들이 남긴 그림, 글씨, 책, 도자기는 우리민족의 혼임을 역설하면서 우리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우리 문화를 보는 눈을 키울 것을 권고한다. 그리고 전형필에게 산골물 ‘간(澗)’자와 추사 김정희 선생이 세한도를 그리면서 인용한 <논어>에 나오는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에서 따온 선비의 지조를 상징하는 ‘송(松)’자를 합해 간송(澗松)이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오세창에게서 사사받으며서 서화수집과 감식을 배운 간송 전형필은 1932년 백두용이 인사동에서 경영하던 고서점 한남서림(翰南書林)을 인수하면서 본격적으로 고서화와 문화재를 수집했다. 특히 백두용으로부터 <조선실록>에 기록된 ‘훈민정음’ 관련 책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평생의 목표로 삼게 된다.
1934년 성북동에 북단장(北壇莊)을 개설하여 본격적으로 서화작품과 조선자기·고려청자 등 골동품과 문화재를 수집하는 한편, 1938년 한국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葆華閣)을 북단장 내에 개설하여 서화뿐만 아니라 석탑·석불·불도 등의 문화재를 수집·보존하는 데 힘썼다. 그의 수장품은 대부분 국보 및 보물급의 문화재로 김정희·정선·신윤복·심사정·김홍도·장승업 등의 회화작품과 서예 및 자기류·불상·석불·서적에 이르기까지 한국미술사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40년대에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육영사업에 힘썼고, 8·15해방 후 문화재보존위원으로 고적 보존에 주력했으며 1960년 김상기·김원룡·최순우·진홍섭·황수영 등과 함께 고고미술동인회를 결성하고 동인지 <고고미술 考古美術> 발간에 참여했다. 1962년 1월 26일 자신이 태어난 집인 종로4가 112번지 자택에서 고혈압으로 급서했다. 향연 57세 유족으로 미망인과 두 아들을 두었다. 장지가 양주군 노해면 창동이었다. 1962년 대한민국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1966년 보화각은 간송미술관으로 개칭되었으며, 북단장에는 한국민족미술연구소가 설립되어 미술사를 연구하고 있다.
간송 전형필의 장지인 ‘양주군 노해면 창동’이 오늘날 번지수로 하면 도봉구 방학동 429~431번지에 해당한다. 여기에 간송 전형필의 묘소와 1910년대 지어진 한옥이 있다. 일제 강점기 때 노해면 창동리에 간송 전형필 소유의 많은 땅과 논이 있었고 마들평야에서 생산되는 쌀을 저장하기 위한 커다란 곡식 창고가 노해면사무소에 인접해서 있었다.
전형필의 본관은 정선(廷善), 자는 천뢰(天賚), 호는 간송(澗松)·지산(芝山)·취설재(翠雪齋)이고, 태어난 곳은 종로4가 112번지이다. 휘문고등보통학교를 나와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진로에 대해 고민 중이던 전형필은 휘문고보 졸업 이후에도 자주 찾아 뵙던 휘문고보 시절 미술교사 였던 고희동으로부터 “왜놈들 손으로 넘어가는 우리 서화와 전적을 지키는 선비가 되라”는 당부를 듣고, 오세창을 소개받는다. 3ㆍ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분이었던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ㆍ1864~1953)은 우리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역대 명인들의 글씨와 그림을 수집해 엮은 ‘근역서휘’(槿域書彙)와 ‘근역화휘’(槿域畵彙)를 전형필에 보여주었다. 오세창은 전형필에게 우리 선조들이 남긴 그림, 글씨, 책, 도자기는 우리민족의 혼임을 역설하면서 우리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우리 문화를 보는 눈을 키울 것을 권고한다. 그리고 전형필에게 산골물 ‘간(澗)’자와 추사 김정희 선생이 세한도를 그리면서 인용한 <논어>에 나오는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에서 따온 선비의 지조를 상징하는 ‘송(松)’자를 합해 간송(澗松)이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오세창에게서 사사받으며서 서화수집과 감식을 배운 간송 전형필은 1932년 백두용이 인사동에서 경영하던 고서점 한남서림(翰南書林)을 인수하면서 본격적으로 고서화와 문화재를 수집했다. 특히 백두용으로부터 <조선실록>에 기록된 ‘훈민정음’ 관련 책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평생의 목표로 삼게 된다.
1934년 성북동에 북단장(北壇莊)을 개설하여 본격적으로 서화작품과 조선자기·고려청자 등 골동품과 문화재를 수집하는 한편, 1938년 한국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葆華閣)을 북단장 내에 개설하여 서화뿐만 아니라 석탑·석불·불도 등의 문화재를 수집·보존하는 데 힘썼다. 그의 수장품은 대부분 국보 및 보물급의 문화재로 김정희·정선·신윤복·심사정·김홍도·장승업 등의 회화작품과 서예 및 자기류·불상·석불·서적에 이르기까지 한국미술사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40년대에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육영사업에 힘썼고, 8·15해방 후 문화재보존위원으로 고적 보존에 주력했으며 1960년 김상기·김원룡·최순우·진홍섭·황수영 등과 함께 고고미술동인회를 결성하고 동인지 <고고미술 考古美術> 발간에 참여했다. 1962년 1월 26일 자신이 태어난 집인 종로4가 112번지 자택에서 고혈압으로 급서했다. 향연 57세 유족으로 미망인과 두 아들을 두었다. 장지가 양주군 노해면 창동이었다. 1962년 대한민국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1966년 보화각은 간송미술관으로 개칭되었으며, 북단장에는 한국민족미술연구소가 설립되어 미술사를 연구하고 있다.
간송 전형필의 장지인 ‘양주군 노해면 창동’이 오늘날 번지수로 하면 도봉구 방학동 429~431번지에 해당한다. 여기에 간송 전형필의 묘소와 1910년대 지어진 한옥이 있다. 일제 강점기 때 노해면 창동리에 간송 전형필 소유의 많은 땅과 논이 있었고 마들평야에서 생산되는 쌀을 저장하기 위한 커다란 곡식 창고가 노해면사무소에 인접해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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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명 | 이동수단 | 거리 | 소요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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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훈제 선생 옛집터 | 우성어린이집 방향 | 1.4km | 도보 20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