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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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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하 송진우 (1889~1945)

고하 송진우
옛집터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 281-1
현주소
도봉구 창동 219-5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1890∼1945)는 중앙학교 교장으로 3·1 독립운동의 기틀을 닦았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과 언론을 통한 민족지도자였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 중앙학교 교장으로 취임해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었다. 1918년 말부터 중앙학교 숙직실을 근거지로 김성수, 현상윤, 최린, 최남선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벌일 방안을 논의했고, 1919년 3·1 운동으로 결실을 보았다. 3·1 운동을 주동한 48인의 한 분으로 며칠 뒤 구속되어 1년 반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21년 《동아일보》 사장으로 취임하여 이후 1940년 폐간될 때까지 20여 년간 사장, 고문, 주필 등을 역임하면서 압제를 무릅쓰고 《동아일보》를 ‘민족의 대변지’로 이끌었다.
《동아일보》를 통해 민립대학설립운동(1922년), 물산장려운동(1923년), 동포위문 활동(1923년), 문맹 퇴치 농촌계몽운동인 ‘브나로드 운동’(1931~1935년) 등을 통해 줄기차게 민족자강운동을 폈다. 국내외독립운동을 비밀리에 연결하고 자금지원을 하거나 이를 크게 보도하면서 국내독립운동의 구심점의 역할을 계속했다. 또한 단군,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의 위업을 널리 알리고자 삼성사 건립을 시도하고(1917), 아산 현충사를 중수(1931) 했으며, 평남 강동의 단군릉을 보수했다(1934).
동아일보 사장으로 있던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신기록으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보도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운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시킨 언론인이었다.
광복이 된 뒤 임시정부 법통론을 주장하면서 여운형, 박헌영 등의 건국준비위원회 참여를 거부했다. 국민대회준비회와 환국지사후원회를 결성하여 건국 준비를 하였고, 한국민주당 창당 시 대표 격인 수석총무에 추대되었다. 그러나 반탁을 강력히 주장한 임시정부 요인들과는 달리 ‘신중한 반탁론’을 펼치다가 1945년 12월 30일 한현우 등의 총격을 받고 피살됐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독립운동가 김병로가 일제의 탄압을 피해 창동(옛 경기도 양주군)에 정착하자 송진우도 창동리 281-1(현재 삼풍유치원 부지)에 직접 한옥을 짓고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살았다. 사람들은 함께 창동에 살던 송진우, 김병로, 정인보를 ‘창동의 세 마리 사자(獅子)’라 불렀다.

관련사진

고하 송진우 고하 송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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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 김병로 옛집터 도봉보건소 방향 270m 도보 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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