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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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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당 정인보 (1893~1950)

위당 정인보
옛집터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 733-4
현주소
도봉구 도봉로 595-1
‘광복절 노래’와 ‘삼일절 노래’로 우리에게 더 익숙한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1893∼1950)는 독립운동과 국학 연구에 평생을 바친 학자였다. 양명학(陽明學)의 대가인 이건방에게 사사(師事)한 뒤 1911년과 1912년 망국의 한을 품고 압록강을 건너 이회영 형제 등 독립운동가들을 만났고 전답을 팔아 군자금으로 지원하였다. 1913년에는 중국 상해로 활동무대를 옮겨 박은식, 신규식, 신채호, 김규식 등과 비밀결사인 동제사(同濟社)를 결성하고 광복운동을 벌였다.
그러다 부인이 첫딸을 낳은 뒤 숨졌다는 비보를 듣고 급히 귀국했고, 이때부터 검은색 한복과 모자, 검은색 안경과 고무신 차림으로 다녔다. 나라 잃은 슬픔까지 조복으로 나타낸 독립 염원이었다.
1923년부터 연희전문학교 전임이 되어 한문학과 조선문학을 강의했으며 《동아일보》와《시대일보》 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이때 《조선고전해설》(1931)과 대표 저술인《양명학연론(陽明學縯論)》(1933)을 펴냈다. ‘오천년간 조선의 얼’ 등을 《동아일보》에 연재하여 한국사에 대한 관심과 자긍심을 환기시키고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1935년에는 정약용 서거 100주년을 계기로 안재홍 등과 함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를 교열·간행하는 등 조선학운동을 주도해 조선 후기 실학연구의 초석을 마련했다.
일제의 내선일체(內鮮一體) 정책에 따라 조선어강좌가 폐지되자 1938년 연희전문을 사임하고 전북 익산군에 은거했다. 광복 후에는 남조선 민주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으나 곧 탈퇴하고 국학대학(國學大學) 초대학장을 지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초대 감찰위원장이 되었으나 이듬해 임영신 장관의 독직 사건을 두고 이승만 대통령과 마찰을 빚어 물러났다.
6·25 전쟁이 일어난 1950년 7월 31일 서울에서 납북됐는데, 9월 7일 황해도에서 폭격 피해를 당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1940년 8월 창동리(현재의 쌍문동)로 이주했다. 그의 옛집은 사랑방이 딸린 규모가 있는 초가였다. 사람들은 독립운동가로 일제강점기에 함께 창동에 살던 정인보, 김병로, 송진우를 ‘창동의 세 마리 사자(獅子)’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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